문경에 묻힌 일본인, 한국 독립유공자 인정
문경출신 박열 의사와 일본에서 히로히토 일왕 암살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옥중에서 사망하고, 유해가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에 묻혔다가 박열 의사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이곳에 영면한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유명을 달리한 지 92년 만에 한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국가보훈처는 11월12일 “순국선열의 날인 11월17일에 가네코 여사가 독립유공자 서훈(애국장)을 받게 됐다.”며 “후손을 찾는 대로 서훈과 함께 독립유공자 명패를 전달할 계획”이라고 했다.
가네코 여사는 1922년 박 의사를 소개받았고 ‘인간의 절대평등에 가장 큰 장애물은 일왕’이라는 생각을 공유했다.
그 후 흑도회가 발행한 잡지 2호부터 ‘박문자’(朴文子)라는 조선 이름을 썼다. 그리고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며 마르크스, 레닌조차 추종하지 않았고, 1922년 8월 박 의사가 니가타현의 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접한 게 두 사람이 의열 투쟁에 나선 전환점이다.
두 사람은 1923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서 일왕을 암살하기 위해 폭탄 유입에 나섰지만 폭탄투척계획이 누설돼 체포됐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각각 20회 이상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개 공판에서 조선 예복과 사모관대를 입고 출두한 박 의사는 이름을 묻는 재판장에게 “나는 박열이다”고 답했다. 또 가네코 여사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박문자”라고 말했다. 3월 25일 열린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박 의사는 “재판은 유치한 연극이다”며 재판장을 질책했고 가네코 여사는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검찰은 사형 대신 무기징역으로 특별 감형했지만 가네코 여사는 옥중에서 은사장을 찢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26년 23세였던 가네코 여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그의 어머니에게 전해졌지만 의문사였다.
이 내용은 2016년 영화 ‘박열’로 다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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