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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암서원(近嵒書院) 중건 환안(還安) 고유제(告由祭)
교육문화

근암서원(近嵒書院) 중건 환안(還安) 고유제(告由祭)

문경매일신문 기자
입력
문경시유림단체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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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유림단체협의회(회장 고재하)는 5월 23일 근암서원(近嵒書院) 중건 준공식에 앞서 이 서원 사당에 모셔진 칠현(七賢)의 위패를 다시 모시고, 고유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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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제를 위해 서원에 전일 입재한 유림들과 당일 입재한 지역유지 등 100여명이 참례하였으며, 신현국 문경시장이 초헌, 권사문 전 학교장이 아헌, 조창섭 유학이 종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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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유제는 고재하 회장이 상례(相禮), 강신도 전 도남서원 원장이 도집례(都執禮)를 맡았고, 고영조 성균관유도회 문경시지부장이 집례(執禮)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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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환안(還安)된 칠현(七賢)은 제1배향인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선생을 비롯하여,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선생,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선생, 목재(木齋) 홍여하(洪汝何)선생, 활재(活齋) 이구(李榘)선생,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선생,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선생이다.

근암서원에는 2006년 1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7호로 일괄 지정된 843점의 유물이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이 청대 선생의 문집목판이며, 그밖에도 청대선생의 교지, 첩지, 영지, 서책, 기록물 등이 있다. 이 중 퇴계선생 친필, 청대문집, 어제어필은 희귀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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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배향 인물인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선생(1473~1508)은 자는 직경, 관은 부림이다. 대제학과 좌참찬을 지낸 연산조 직신 문광당 허백당 홍귀달 선생의 아들이다. 연산 을묘년(1495)에 사마시, 같은 해에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홍문관 정자를 거쳐 교서 교리를 하다가 예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갑자사화(1504)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하루는 섬 안에 사사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하려 어찌할 겨를 없이 매우 급(急)하였으나, 우암선생 형제는 태연자약(泰然自若)하며 말하기를 ‘군명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망칠 수 있느냐.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중정반종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다 불행히도 36에 돌아가셨다. 선생은 도학이 높고 엄정 충직하여 후학의 사표로 추앙받았다. 저서로 ‘자만사(自挽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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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선생(1561~1613)은 관이 광주(廣州)다. 중종 신축년에 태어났으며, 선조 경진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벼슬을 시작, 경인년(1590)에 직제학이 되었고, 임진년(1592)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해 4월에 왜란이 일어났으며 평양 대동강에서 일본인 현소 등과 담판을 짓고, 침략의 불의함을 몹시 꾸짖었다. 그리고 왕명을 받아 요동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 명나라 병사가 내려왔을 때는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 무술년(1598)에 우의정, 신축년(1601)에 도체찰사, 임인년(1602)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조 영창대군 옥사가 간신들의 농간으로 일어나자 직언으로 지극히 아뢰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지 수일 만에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는 문익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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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선생(1540~1594)은 자는 임부요, 관은 상산이다. 집현전 부제학 상직의 6대손이며, 옥과 현감 범의 아들이다. 중종 경자년(1540)에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였다. 선조 경오년(157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론을 시작으로 수찬, 응교, 집의, 청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보은에서 창의(倡義)하여 6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충보군이라 이름하여 상주의 적이 호서로 가는 길을 막았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도리로 행하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와 화목으로 일생을 지냈으며, ‘주서절요’, ‘근사록’, ‘소학 등을 깊이 연구하시다가 갑오년(1594)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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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木齋) 홍여하(洪汝何)선생(1620~1674)은 자는 백원이요, 관은 부림이다. 문광공 허백당 홍귀달 선생의 6세손이며, 대사간 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우복 정경세 선생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선비가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효종 갑오년(1594)에 등과하여 검열, 전적, 정언, 좌랑, 사간을 지냈다. 정언으로서 왕의 언동을 간하니 효종이 가납(嘉納-기쁘게 받아들임)하였다. 그 뒤로 당로자들의 꺼림을 받아 고유 찰방에서 파직되었다. 무술년(1658)에 경성 판관으로 부임하여 어진 정사를 폈으며, 을해년에 성학 치도의 요를 상소하고 병마사 권우의 무고로 황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15년간 후진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사서에 통하고 주서에 전심하여 그 식견을 따를 이가 없었다. 숙종이 병조정랑에 특제하였으나 병이 중하여 나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저서로 ‘사서발범구역’, ‘주역구역’, ‘휘찬려사’, ‘동사제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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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재(活齋) 이구(李榘)선생(1613~1654)은 자는 대방이요, 관은 전주다. 효령대군 8세손이며 정랑 광흡의 아들이다. 광해 계축년(1613)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제자백가서’를 탐독하다 외조부 칠봉 황시간의 권유를 받고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게 되었다. 정주학과 퇴도학에 전념하여 과거를 버리고 산간에서 후진에게 이기의 진수를 논강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갑오년 4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선생(1664~1732)은 자는 중서요, 관은 연안이다. 가은 심의 증손이요, 예조참판 옥(沃)의 아들이다. 현종 갑진년에 출생하고, 정주학을 탐구했다. 좋은 집안이면서도 분잡하고 화려(華麗)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성학에만 몰두하여 저술에 힘쓰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는 ‘역통(易統)’, ‘대상편람(大象編覽)’, ‘사서강목(四書講目)’이 있으며, ‘식산 이만부 전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조 8년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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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선생(1679~1759)은 자는 태중이요, 관은 안동이다. 구학재 구의 증손이요, 증이판(贈吏判) 심(深)의 아들이다. 숙종 기미년에 출생하였다. 숙종 경인년(1710)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로부터 이의(吏議)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지중추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들어가 찬수 당상이 되어 국사를 수찬하였다. 영조가 어필 16자를 하사 격려하였다. 영조 정미년(1727)에 만경 현령이 되었고, 무신의 난(1729년)이 일어났을 때, 미리 반정을 살펴 적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부에 보고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유비무환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경내가 무사하였다. 고향에서는 퇴계 선생을 사법(師法)으로 하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논하고 경연에도 첨하였다. 저술로는 ‘근사록집해’ 등 여러권을 남겼으며, 영조 기묘년(1759)에 돌아가셨다. 시호는 희정공(僖靖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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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매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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