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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화원, 조선시대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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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화원, 조선시대로의 여행

문경매일신문 기자
입력
문화가족 4대궁 문화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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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한근 문경문화원장은 5월 31일 회원 60명과 함께 조선시대로의 여행-4대궁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문경사람들이 서울과 왕래가 많고, 자녀들의 서울 거주가 많으며, 서울에 집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막상 서울의 전통문화유산을 접할 수 없었던 현실에 따라 나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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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탐방은 우리전통문화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4대궁 중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에 대하여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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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은 태종 5년인 1405년에 임금이 임어(臨御)하였으며,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과 함께 조선의 양궐(兩闕)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경복궁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정정(政情) 불안으로 사실상 10년간 제구실을 하지 못한 채 비어 있었다. 개성(開城)으로 환도(還都)했던 2대 정종에게 와위를 이러받은 태종은 취약한 권력기반을 극복하기 위해 한양(漢陽) 천도(遷都)와 새로운 궁궐(宮闕)의 신축(新築)을 계획하여 창덕궁을 지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버리고 난 뒤 고종 5년인 1868년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폐허(廢墟)로 남아 있었으므로 실제 사용기간은 조선 전기와 말기를 합쳐 250여 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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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창덕궁은 건립 이후 임진왜란 당시 소진(消盡)되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순종이 창덕궁에서 승하하는 1926년까지 520여 년 동안 한 왕조의 궁궐 기능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던 의미 있는 곳이다. 즉 창덕궁은 조선왕조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이 명멸(明滅)한 실질적인 중심무대였던 것이다.

헌종 13년인 1847년에 지은 후궁들의 공간인 낙선재(樂善齋)는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순종이 머물던 곳이며, 순종의 계후(繼后)인 윤황후도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과 일본인 부인 이방자(李方子)여사도 이곳에 살았으며, 1989년 4월 28일 이방자여사가 별세하면서 주인 잃은 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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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창덕궁의 후원(後苑)은 비원(秘苑)으로 알려진 곳인데,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 내린 자연스런 구릉지(丘陵地) 정원이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숲과 울창한 수림 속에 18채의 누각과 22채의 정자가 남아 있다. 이곳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으며,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던 공간이다. 또 임금이 논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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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은 처음 수강궁(壽康宮)으로 지었으며,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이 생존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면서 대부분의 전각을 헐고 1909년(융희 3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고, 1911년에는 아예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꾼 비운(悲運)의 궁궐이다.

이날 문화탐방은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귀향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문경매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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