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소향전 44 김경수 아직도 줄기가 성한 고구마 넝쿨을 손으로 헤집어가며 광수에미는 땅을 뒤적거린다. 제상에 올리거나 먹을 것을 캐러 텃밭에 온 것이다. 말이 추석이지 아직 오곡이 영글라치면 족히 한 달은 더 있어야 될 텐데 늘 제상에 올릴 것도 흔치 않게 다가오는 것이 음력 추석이다. -그라모… 오데… 딴년한테서 씨라도 받았다는 말인가?- 동서가 던진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다. “부엌에서 일 시키려 데려온 아이가 아닐세.” -아이제…. 나이로 봐서도 그건 안 맞아들고. 그라모? 뭐꼬?- 소향의 나이를 생각해봐도 딴 여자한테서 본 아이는 아니다. 또 동서가 대하는 태도를 보아도 분명 시앗하는 태도는 없으니 도통 모를 일이다. 허리를 펴고 뒤돌아서 저만치 역시 영근 고구마를 찾고 있는 소향을 보다가 부른다. -야야, 니 일로 좀 온나- 손에 고구마 몇 개를 들고 있지만 크기가 그저 그렇다. 소향이 고구마 넝쿨에 엉덩이를 반쯤 묻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돌려 광수에미를 본다. -와예?- -좀 오라카이- 오라고 한 작은아지매가 오히려 소향이 쪽으로 발을 옮긴다. 고구마 줄기를 다치지 않게 발을 성큼하며 작은아지매가 소향이 쪽으로 다가간다. -니 말이다. 우리 집에 모하러 왔나? 내 말은… 우째 오게 됐나 하는 기다- 겨우 씨알이라곤 그저 작은 아이 주먹만 하거나 아니면 어른 엄지만한 굵기가 전부인 고구마 몇 개를 손에 들고 있던 소향은 대답 대신 흙 묻은 고구마를 손으로 털어낸다. -그건 큰아지매한테 물어보이소. 지는 말 못합니더- -뭐라꼬? 말 못해? 야야, 니 무신 큰 비밀이라도 있나? 와 말을 못해?- 큰아지매가 그저 아무 말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다 자기가 알아서 할 것이니 그때까지 맡겨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동안 역정을 내며 하수 다루듯 하는 작은아지매가 엊그제 정기에서 큰아지매가 한 말 때문에 하는 질문이라는 것을 소향도 안다. -비밀은 아이라예. 케도… 큰아지매가 말하기 전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하싯서예. 그라이 지도 말 못합니더- 더 궁금해지는 광수에미다. 사실 동네에서 안방 차지하고 앉아있는 동서 빼고는 아무도 자기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는데 밤톨만한 영글지도 않은 계집아이가 당돌하게 딱 잘라서 대답을 한다? 하지만 광수에미도 별 도리가 없다. 소작이라도 부쳐야 종가 둘째 며느리로서 은근히 유세를 하거나 협박을 할 테고 집안 대소사에 부엌일 시키러 불러주지 않을 것을 빌미로 큰 목소리가 통할 것이지만 지금 이 계집아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내 니기 비밀 지키꾸마. 뭐꼬? 내기만 말해도고 응?- 허리를 반쯤 굽혀 땅을 보고 있는 소향의 눈높이로 얼굴을 맞대며 이제는 달래보는 광수에미다. -그래도 안되예- 그리고는 소향이 돌아서서 저만치 가버린다. 어이도 없고 엉치가 막히는 기분이지만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다. -니 정말로 그켔제? 안 좋을낀데…- 눈에 쌍심지가 돋아있는 광수에미는 체념하고 고구마 줄기를 확 걷어챈다. -됐다, 고마 가자- 대소쿠리에 반쯤 담긴 고구마를 소향이 허리에 끼고 광수에미의 뒤를 따라온다. -작은아지매요- -와- 냉담한 대답이다. -광수 보고 지한테 글 좀 갈카주라 해주이소- 글? 자기도 배운 적 없는 글? 안방에나 있는 동서야 그래도 서울내기고 무신 학교를 다녔다고 했으니 글을 안다고 하지만 촌에서 여자가 글을 왜 배워? 그 시간에 풀이나 더 매고 길쌈이나 하면 더 하지? -글은 와 배울라 카노? 일이나 배우민 됐지- -그냥 배아둘라꼬예- -추석에 할 일이 태산이다. 낼 모레 아이가? 누굴 부를꼬?- 엉뚱한 대답이다. 아니 광수에미의 머릿속에는 동네 아낙 중에 누구를 불러서 추석 일을 할 것인지로 가득하다. 사실 종가의 일을 혼자 감내하기는 힘들 수밖에 없다. 여느 집 제사도 차리기 힘든 게 추석상인데 그래도 종갓집 제사이니 오죽 하겠는가? 제종들이 모여도 기백명은 들 것이고 사당에 모실 음식만 해도 수십 가지이니 그 입을 먹이고 그 제기를 채워야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광수에미의 입에는 큰 미소가 번진다. 이유는 올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방금 고구마를 캐온 그 옥답도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논도 열다섯 마지기는 준다고 했겠다. 그 동서 시집살이도 이제 얼마 남자 않았으니…. 내 살림 내가 꾸리고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눈에 읍내에 있는 청수장 색시들이 한다는 파마라는 것이 선하다. 조석으로 감고 말리고 빗고 틀어 올리고 하는 불편도 없앨 양 꼭 파마도 하리라. 소향이 바짝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도 귀에 안 들릴 정도로 손이 오글거리고 가슴 저리게 혼자 유람을 하며 집으로 가고 있다. 솟을대문 보일 때 문 앞에 웬 남자가 지게를 진 채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기웃거리는 것이 무슨 일로 온 것이 확실하다. 광수에미는 큰 목소리로 묻는다. -누군데 남의 집을 기웃거립니꺼?- 초라한 복장의 중늙은이다. 말려 올라간 한 쪽 바지는 흙색이 역역하고 굵은 주름골로 뒤덮인 얼굴로 봐서도 쉰은 족히 넘었겠다. -아, 예, 지는 저 신덕에서 왔심더. 누가 이집에 말 좀 넣어달라 케서…- -누가 무신 말을 넣어달라 했는지 해보이소- -이집에 주인이십니꺼?- 말을 남기지만 눈은 안채의 위용을 구경하느라 번뜩거린다. -말해 보라카이요?- 아주 안하무인격이다. 행색이 그러한 사람에게는 더 위세를 부리는 광수에미다. -마님한테 전해달라 캅디다. 보살님이 열여덟 되는 날 들린다꼬예. 그카민 안다꼬.- 빈 지게를 연신 꾸벅거리며 남정네는 뒤로 한두 발 물러서서 돌아간다. -아저씨예- 숨도 멈춘 소향이 황급히 남정네를 부르며 뒤따른다. 광수에미는 별로 중한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집안으로 쑥 들어가 버린 뒤다. 뒤돌아선 남정네는 그 마님 뒤에 있던 젊디젊은 아가씨가 자기를 왜 부를까 생각한다. -와?- 딸 또래처럼 보이니 말도 놓고 한다. -그 보살님이 삼천포에서 오신 보살님 맞지예?- 숨이 헐떡거린다. -그래, 니 아나?- -운제 오싰어예?- 마치 죽은 사람이라도 만난 양 소향은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제 저녁에 오싯다. 와? 여는 추석 지나고 한 삼일 후에 들린다꼬 아까 내가 전했는데? 와?- -아저씨가 오데서 오싯다 켔지예? 지가예…. 보살님 보러 가야 됩니더- -니가? 이집 마님이 아이고?- 남정네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분명히 보살님이 말하시기를 이집의 마님이 자기를 기다릴 것이라 하셨는데…
문경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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