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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는 동학 근거지
향토사가 이창근
등록날짜 [ 2024-04-22 23:11:30 ]

[기고]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는 동학 근거지

향토사가 이창근


최근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를 수차례 현장 답사하고 최종점(59) 이장과 주민들을 만나 문헌기록에 따라 현장조사를 실시하는 등 증언자들을 동영상 촬영했다. 

 

그 결과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는 동학의 최고지도자인 대접주(大接主) 최맹순이 18943월부터 동학농민혁명군을 총지휘했던 경상도 서북지역(강원도, 충청도까지)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맹순은 첩첩산중 소야리에 동학 지휘부를 설치하고, 예천을 비롯한 경상도 서북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총지휘했던 최고사령관이었다.

 

최맹순은 소야리 입구, 종곡 골짜기에서 여러 해 동안 옹기를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분을 옹기장수로 위장했다. 최맹순이 옹기, 사기그릇을 만들어 팔았던 사기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는 현장도 확인했다.

 

당시 전라도 고부 봉기가 한창일 때 최맹순은 동학농민혁명군 사령부 접()을 설립하고 면()과 리() 단위까지 조직하여 48개 접소에 그 교도가 7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조 말, 경상도 서북부지방은 전라도 전봉준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동학혁명의 뜨거운 현장이었던 것이다.

 

농민군을 공격하기 위한 집강소가 예천군 관아의 객관(客官)에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 농민군 11명이 관군에 끌려가 한천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최종점 이장은 강릉최씨로서 예부터 이 마을은 강릉최씨들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강릉최씨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1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동학농민혁명 사령관으로 강원도 출신 최맹순의 후손들이 세거지를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과, 최맹순이 옹기와 사기그릇을 만들어서 팔았다는 사기골(종곡 골짜기)이라는 지명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상주 은척, 문경 호계, 예천 유천-용문 일대의 농민들은 지주, 양반, 아전, 토호들의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낯선 중국 만주로 떠날 정도로 생활이 처참했으며 지주, 양반, 벼슬아치들이 관군과 뭉쳐 농민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농민군이 많은 살육을 당했는데 그 총지휘본부가 산북면 소야리였다는 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석문(石門)은 동학농민혁명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로서 일본군과 최초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도 밝혀냈다.

 

또 이곡 석문 위 5km 지점에 있는 석봉(石鳳) 굴골 동네의 동굴이 농민군들의 은신처였으며 회의 장소였다.

 

석봉 언덕 너머 석달(돌담골) 마을은 농민군이 관군을 피해 숨어 들어와서 생긴 마을이다(석달마을 김봉식 1992년 증언).

 

그리고 18945월에 조선에 출병(出兵)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선을 가설하고 낙동, 태봉, 문경 등에 병참부를 설치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농민군이 태봉 병참부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그해 829일 충주 병참부의 일본군 25명과 인부 12명이 태봉으로 가던 중 산북면 소야리 입구 이곡리 석문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 600여명과 전투가 벌어져 농민병영가옥 11채가 불타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 후 이듬해(1985) 일본은 조선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했으며 그로 인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끝내 조선이 일본에 패망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관군, 일본군에 패배한 농민군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산속으로 피신하여 화전민으로 전락했고 농민군 측의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다.

 

동학농민혁명 사령관 최맹순은 아들 최한걸과 관군에 체포되어 예천 장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최맹순은 목을 잘라 장대에 내거는 효수를 당했으며, 아들 최한걸은 남사장(南沙場)에서 총살해 모래사장에 파묻었다.

 

~ 슬프다. 목숨 바쳐 구민(救民)의 선봉에 섰던 이 위대한 업적, 역사적 현장이 문경인들의 무관심과 세월의 덮개 속에 잊히고 묻혀, 아무도 아는 이도 없고 표지석(標識石) 하나도 없는 허망한 역사의 현장 위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무언지 북받치는 어두운 마음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문경매일신문

문경매일신문 (shms201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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