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경지역 침례교회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신인철 교수 한국의 기독교 교단은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이 있다. 혹자는 위 교단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4대 정통 교단이라 말한다.
각 교단의 교세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이는 초창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을 권역별로 나눠 복음을 전하자는 네비우수(Nevius) 정책 때문이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지로 결정됐다. 그것이 문경에 장로교회가 일찍 세워진 이유이다. 문경은 장로교 강세 지역이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침례교 교세도 강하다.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문경 시민도 많은 것 같다. 한국 침례교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 곳이 문경이지만, 이를 올바로 아는 분은 소수에 불과하다. 문경과 예천 지역 침례교 역사는 다음과 같다. 캐나다 출신 침례교 선교사와 국내 전도자가 문경에 처음 복음을 전한 것은 침례교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 때였다. 평신도 선교사 펜윅(Malcoolm C. Fenwick)은 1889년 12월 11일 함경남도 원산에 한국 선교 본부를 설치한다. 캐나다에서 설립된 엘라씽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 Mission)는 논산 강경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펜윅 선교사는 엘라씽 선교회와 통합하여 오지 선교에 집중한다. 오지 선교 대상 가운데 가장 많은 열매를 맺은 곳이 문경과 예천이다. 문경에 처음 복음을 전해준 침례 교인이 누군지 확인할 사료가 없다. 울진을 거쳐 문경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가설만 있다. 근거 있는 역사 자료에 따르면, 예천군 용궁에 사는 장진운, 노상묵, 노재천에게 처음 복음이 전해졌다. 예천에 첫 침례교회가 세워졌으며, 그들은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며 예배드렸다. 용궁침례교회의 원래 이름은 훤평 교회였다. 1908년 10월 20일 첫 예배를 드렸다. 용궁교회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복음화 전진 기지가 됐다. 예천과 문경지역에 빠르게 교세가 확장됐다. 점촌침례교회가 문경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 1909년 10월 5일 김창원, 박래원(박경배 목사가 후손), 김성규 성도가 문경군 호서남면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 세 가정 중심으로 교회가 개척됐으나, 예배처소가 없어 어려움이 있었다. 얼마 후 김창원이 자신의 사가를 희사하여 예배처소로 사용하게 됐다. 역사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점촌침례교회는 이미 50여 명의 성도가 모였다. 점촌교회 발전에 헌신한 대표적 인물이 노재천, 신성균 목사이다. 호서남면에서 출생한 노재천 목사는 용궁침례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1917년 제12회 간도 종성동 교회에서 개최한 대화회(교단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고향 점촌침례교회에서 사역한다. 그는 만주에서 순회 사역을 했고,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신성균 목사는 1914년 1월 5일 이만기 성도의 전도로 유곡침례교회에 출석한다. 그는 충청도 지역 중심으로 순회 전도 사역을 했다. 신성균 목사는 울진 행곡 교회에서 개최된 제19회 대화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의 사역 무대는 평안북도 자성 구역과 중국의 임강 구역이었다. 마성침례교회는 문경지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침례교회이다. 유곡에 세워졌던 교회가 폐쇄되자, 황수만 성도가 1910년 마성면 신현리 330번지 초가에서 마성교회를 개척한다. 개척 3년 만에 70여명의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교회지도자들은 예배처소를 신현리 309번지로 이전 확장했다. 처음에는 ‘새원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 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성교회로 명칭을 변경한다. 점촌과 마성교회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침례교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했다. 두 교회의 지원으로 문경과 상주에 침례교회가 많이 세워졌다. 현재 문경에는 유곡침례교회, 공평침례교회, 영강침례교회, 영순침례교회, 문희침례교회, 동로침례교회, 생달침례교회, 신전침례교회, 정리침례교회, 송죽침례교회, 동문침례교회, 새소망침례교회, 문경주행전, 내화, 수평, 열린교회 등이 있다. 문경지역 교회들은 침례교단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교단 설립 초기 문경지역 교회는 다른 지역 복음화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펜윅 선교사의 오지 선교가 문경에서 큰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경지역 교회의 역할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한 일명 ‘원산사건’에서 32명의 기독교 목사, 장로가 투옥됐다. 그 32명 가운데 4명이 점촌침례교회 출신의 노재천 목사, 신성균 목사, 김주언 감로, 이덕상 감로였다. 한 교회에서 4명의 지도자가 일제 박해 상황에서 투옥된 사건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드문 일이다. 이들이 한반도와 간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함으로 침례교단 교세가 확장됐다. 전국의 침례교회를 방문해 보면 문경 출신 목회자가 세운 교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교단 총회인 대화회가 문경에서 열렸다는 것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대한기독교 제11회 대화회가 1916년 마성침례교회에서, 제21회 대화회가 점촌침례교회에서 개최됐다. 당시 두 교회에서 대화회를 개최했다는 것은 이들 교회가 교단의 중심이었다는 뜻이다. 문경의 침례교는 예천과 더불어 교단의 지도자를 많이 양성했다. 문경, 예천을 포함한 경상북도 북부지역 출신은 한국침례신학대학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작고한 정진황 전 학장(풍양), 도한호 전 총장(영주), 권혁봉 전 학장(용궁), 고 노윤백 교수(점촌), 엄원식 전 교수(유천, 영순), 장수환 전 교수(용담), 노은석 전 교수(점촌), 신인철 교수(마성)를 배출했다. 학교 이전과 건축을 총괄한 양승태 장로(영순, 전 사무처장)는 미래 침례교 100년을 이어갈 캠퍼스를 조성했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71년 역사에 문경과 예천 출신 교수들이 후학 양성에 매진함으로, 교단 어른들은 침신대는 문경 사람들이 기초를 놓았다고 말한다. 원산과 논산, 강경에서 시작된 침례교회가 초창기 가장 크게 꽃을 피운 곳은 문경과 예천이다. 그 결과 문경의 침례교회는 기독교 한국 침례교단의 역사적 뿌리 역할을 했으며, 현재 전국에 산재한 침례교단의 부흥과 발전에 기틀을 놓았다. (신인철 교수는 1966년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나 동성초-점촌초-문경중-문창고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유학했으며, 신학대학에서 학위와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 대전광역시에서 일간지에 다양한 칼럼을 쓰고 있으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 자주 문경을 왕래하고 있다.) 문경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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