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경–함창, 경계를 넘어 ‘하나의 도시’로

경북 북부의 도시 지형은 지금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위기, 산업 구조의 변화, 그리고 중부내륙고속철도(KTX-이음)라는 거대한 교통 인프라의 등장은 기존 행정구역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요구한다. 이 변화의 한복판에 문경시와 상주시 함창읍이 있다. 행정적으로는 서로 다른 자치단체이지만, 생활·경제·교통 측면에서는 이미 하나의 도시처럼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많은 논의가 ‘통합’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하지만, 그 본질은 결코 단순한 행정구역 변경이 아니다. 문경과 함창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역사적 경험과 생활권의 중첩 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감정이나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 역사적 사실과 공간 구조, 그리고 미래 도시 전략이라는 냉정한 기준 위에서 논의돼야 한다.
1. 역사에서 본 문경–함창: ‘뿌리’를 공유한 공간
문경과 함창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함창은 고대 고령가야(古寧伽倻)의 중심지로, 이 일대 정치·문화의 핵심 거점이었다. 신라 경덕왕대에는 고령가야의 영역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개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오늘날 문경 지역의 관산현, 가선현, 호계현 등은 모두 함창을 본군으로 둔 속현이었다. 다시 말해, 고대의 시점에서 보면 함창이 문경의 모체였던 셈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두 지역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다. 문경과 함창은 모두 상주목 관할 아래 놓여 있었고, 영남대로라는 국가적 간선 교통망을 공유하며 관문과 거점의 역할을 분담했다. 문경이 험준한 관문이었다면, 함창은 물자와 인구가 집산되는 평야의 중심지였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졌지만, 하나의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상호보완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문경은 산지, 함창은 평야’라는 지리적 특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것이 산업·주거·교통의 자연스러운 분업 구조를 만들어 왔다. 역사는 이미 오래전에 이 두 지역을 하나의 생활·경제권으로 묶어 놓았다.
2. 근현대 행정개편: 경계는 바뀌었지만, 삶은 이어졌다
근대 이후 행정구역 개편은 문경과 함창의 관계에 변곡점을 만들었다. 1906년과 1914년의 군면 개편을 거치며, 기존 상주군(함창 포함)에 속했던 산북·산서·산동·산남면 등이 문경군으로 편입됐다. 이는 지리적으로 함창의 북쪽 생활권이 문경 행정구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계기였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9년이었다. 점촌시 확장 과정에서 함창읍 윤직리 일부가 점촌으로 편입되며, 행정 경계는 사실상 시가지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이후 점촌과 함창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연담화(連擔化) 단계로 접어들었다. 주택단지와 상업시설, 산업시설이 경계를 넘나들며 조성됐고, 주민들의 일상 동선은 행정구역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이 시기부터 함창 주민 다수는 문경의 병원, 시장, 학교, 문화시설을 이용하는 점촌 생활권에 자연스럽게 편입됐다.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 역시 공동 이용이 이뤄지며, 행정은 둘이지만 삶은 하나인 구조가 굳어졌다.
3. 현재의 현실: ‘한 지붕 두 가족’ 도시 구조
오늘의 점촌–함창은 사실상 하나의 도시다. 출퇴근, 통학, 소비, 의료 이용이 동일한 공간에서 이뤄지며, 주민들은 ‘어느 시에 사느냐’보다 ‘어디가 더 가깝고 편리한가’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이는 전형적인 행정권과 생활권의 괴리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함창에 있는 함창고등학교와 상지여고가 문경 학생들에 의해 성장해 왔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괴리가 행정 효율과 주민 편익을 동시에 저해한다는 점이다. 동일 생활권 내에서 공공시설이 중복 투자되고, 도로·교통·복지 정책이 따로 설계되며, 도시 전체 차원의 성장 전략을 수립하기 어려워진다. 특히 인구 감소 국면에서는 이러한 비효율이 도시 경쟁력을 빠르게 잠식한다.
4. KTX라는 변수: 함창역은 ‘블랙홀’이 될 것인가
중부내륙고속철도는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잠재력을 지닌다. 문경–상주–김천을 잇는 약 74km 구간에서 역 배치와 기능 설정은 단순한 교통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미래 권력 구조를 좌우한다.
철도 공학적으로 준고속열차의 적정 역간 거리는 20~30km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문경–상주–김천의 3개 역 체제가 가장 효율적이다. 그러나 점촌–함창 단일 생활권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함창역 신설 및 광역 거점화라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함창역이 신설될 경우, 이는 상주역과 문경역의 수요를 동시에 흡수하는 ‘경제적 블랙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해법은 경쟁이 아니라 기능 분화다. 상주역은 행정·일반 철도 중심으로, 문경역은 관광·레저 중심으로, 함창역은 점촌–함창 통합 수요를 담당하는 고속철·물류·비즈니스 허브로 설정해야 한다. 선택적 정차(Skip-Stop) 방식은 속도와 접근성의 균형을 맞추는 기술적 해법이 될 수 있다.
5. 통합의 본질: 흡수가 아닌 상생
문경–함창 통합 논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빼앗긴다’는 인식이다. 상주시 입장에서는 북부권 이탈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고, 문경 시민 역시 원도심 공동화에 대한 걱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통합의 목표는 어느 한쪽의 이익 극대화가 아니라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다.
점촌 원도심은 KTX 관문 기능 이전을 계기로 문화·공원·도시재생의 중심으로 재편할 수 있다. 함창은 광역 교통과 산업의 중심으로 위상을 격상하고, 상주는 행정 슬림화로 확보한 자원을 남부권과 스마트 농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균형을 도모할 수 있다. 정부의 통합 인센티브와 특별교부세는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할 재정적 마중물이 된다.
6. 결론: 경계를 지킬 것인가, 삶을 지킬 것인가
과거에는 함창이 문경의 뿌리였고, 현재에는 문경이 함창의 생활 중심이다. 이 두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역사다. 행정구역이라는 선은 시대에 따라 그어지고 지워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경계를 고집하며 비효율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와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도시 모델로 도약할 것인가. 문경–함창 통합(상생)은 행정 실험이 아니라, 경북 북부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다. 역사에서 길을 찾고, KTX에서 미래를 여는 도시.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 실체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문경매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