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지혜

「 한 장의 지혜」 제1장 삶의 지혜 3) 오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문경매일신문
입력
지홍기 /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전)국가녹색성장위원회 위원, 전)한국물학술단체연합회 회장
한 장의 지혜(3) 오래 가려면 천천히 가라
한 장의 지혜(3) 오래 가려면 천천히 가라

빠름의 신화
현대 사회는 속도를 숭배한다. 효율(效率)이 미덕이 되고, 빠른 결과가 능력이 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쉼을 잊었다. 그러나 빠름은 언제나 좋은 것일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은 서두름 속에서 잃어버리기 쉽다. 관계, 건강, 사색(思索)의 여유, 진심 같은 것들 말이다. 인생을 마라톤(marathon)에 비유하자면, 전력질주만 하는 사람은 결승선에 다다르기 전에 지쳐버린다. 오래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페이스(pace)를 안다.

 

속도보다 지속
젊은 시절 나는 늘 목표를 향해 달렸다. 연구, 강의, 사회활동—모든 일을 일정표로 채우며 더 많이, 더 빨리(more & faster)’를 외쳤다. 그 결과 몇 번의 성취는 얻었지만, 어느 날 문득 이렇게 급히 달려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그때 깨달았다. 꾸준함은 속도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지속(持續)은 단거리의 열정보다 강한 힘을 갖는다. 오래 가는 사람은 순간의 폭발력이 아니라, 꾸준히 걸어가는 의지로 세상을 바꾼다.

 

자연이 가르쳐주는 리듬
문경의 산길을 오르면, 나무의 성장이 얼마나 느린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한 해의 나이테(tree ring)가 겨우 손톱만큼 늘어났을 뿐인데, 그 지구력이 세월을 이긴다. 강물도 그렇다. 서두르지 않지만 끝내 바다에 이른다. 자연(自然, nature)의 모든 생명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의 원리를 따른다. 오래 가는 길 생각보다 소박하다. 오늘의 한 걸음, 내일의 또 한 걸음—결국 그 발걸음이 길이 된다.

 

느림은 낭비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천천히 한다는 것을 비효율로 여긴다. 그러나 느림은 낭비가 아니라 집중의 미학이다. 서둘러 얻은 결과는 금세 사라지지만, 시간을 들여 쌓은 것은 오래남는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어느 하나에도 완전하게 몰입하지 못한다. 느림은 선택과 집중의 다른 이름이다. 서두름 속에서는 디테일(detail)이 사라지지만, 느림 속에서는 깊이가 생긴다.

 

관계도 천천히 자라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느림을 필요로 한다. 첫인상보다 진심이, 속도보다 신뢰가 중요하다. 오랫동안 쌓은 관계는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인생의 동반자, 오랜 친구, 신뢰할 제자나 동료—모두 시간을 통과하며 쌓인 결과다. 요즘 사회가 잃어가는 것은 바로 그 시간이 만든 깊이(depth made by time)’. 좋은 인간관계는 빨리 생기지 않는다. 기다림과 이해, 그리고 꾸준한 배려가 필요하다.

 

천천히 가는 사람의 자신감
천천히 간다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속도를 스스로 정할 줄 아는 사람, 즉 자기(self) 리듬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속도가 늦다고 느껴져도 초조해하지 말자. 천천히 걸을수록 풍경이 더 잘 보이고, 더 멀리까지 시야가 닿는다. 오래 가는 사람에게는 겉보기엔 느리지만, 내면엔 단단한 지속의 에너지(energy)가 있다.

 

인생의 완주를 위해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호흡하며 끝까지 완주(完走)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에 쉬어가도 좋다. 방향을 바꾸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길에서 배운다. 그 배움은 속도보다, 성취보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산이다. 그러니 오늘 하루, 조금 늦어도 괜찮다. 오래 가기 위해, 진정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때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wisdom of life).

 

맺음 말

빠름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속도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한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끝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며, 오래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리듬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두름은 순간의 성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깊이와 지속성은 천천히 쌓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자연이 보여주듯 모든 성장은 느리지만 꾸준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계 또한 시간과 신뢰 위에서 자라나며, 조급함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낸다. 천천히 간다는 것은 뒤처짐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가진 삶의 태도다. 오늘의 한 걸음이 모여 내일의 길이 되듯,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지속의 힘이 결국 인생을 완성한다. 느림 속에서 우리는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이해하며,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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