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맹순 동학 수접주, 132년 만에 위령(慰靈) 받아

문경의 이창근 향토사가가 2년여 전 밝혀낸 문경 동학농민혁명 현장에서 동학 수접주 최맹순 의사를 기리는 첫 위령제가 열렸다.
10일 문경시 산북면 소야리 148번지 일원에서는 상주·문경·예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학 수접주 최맹순(崔孟淳) 의사의 제1주기 위령제가 봉행됐다.
최맹순 의사가 1894년 11월 22일 예천 장날 남사장에서 효수된 지 132년 만에 처음으로 지역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식 위령이 이뤄진 것이다.

최맹순(1853~1894)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문경 등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지도자로, 수만 명 규모의 농민군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본래 강원도 춘천 출신인 그는 예천 일대에서 옹기장수로 위장해 포교 활동을 벌이며 농민들의 신망을 얻었고, 1894년 3월 문경 산북면 소야리에 접소를 설치해 관동수접주 역할을 맡았다.
그가 이끈 세력은 ‘관동포(關東包)’로 불렸다. 기록에 따르면 1894년 6~7월에는 하루 수천 명이 입도했으며, 최종적으로 48개 접과 약 7만 명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된 것으로 전해진다.

최맹순은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 아래 신분 차별 철폐와 폐정 개혁을 내세우며 반봉건 투쟁에 나섰다. 특히 농민군이 생매장당하는 사건 이후 예천 읍치를 봉쇄하며 관군에 강력히 맞섰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 공격으로 예천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단양·제천 등 충청도 일대로 후퇴한 뒤에도 농민군 100여 명을 다시 규합해 예천 재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1894년 11월 21일 충주 독기(현재 엄정면 부근)에서 체포됐고, 당시 42세였던 그는 아들 최한걸과 함께 처형됐다.

최맹순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경북북부 지역 최대 규모의 농민군 조직을 이끌며 외세 침략과 봉건 사회에 저항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아들과 함께 목숨을 바친 그의 삶은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이창근 향토사가의 끈질긴 현장 조사로 재조명됐다. 이 선생은 수차례 산북면 소야리와 이곡리 일대를 탐사하고, 최종점(61) 마을 주민과 이장 등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으며, 관련 내용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창근 선생은 “산북면 소야리는 대접주 최맹순이 1894년 3월부터 경상도 서북지역은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아우르며 동학농민혁명군을 총지휘했던 근거지”라며 “산북면 이곡리 석문은 일본군과 최초 전투가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현장”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조사 내용을 동학 연구와 기념사업을 이어온 박찬선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회장, 전장홍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 회장 등에게 확인받고 관련 서명도 확보했다.

이창근 선생은 “목숨 바쳐 구민(救世)의 선봉에서 어둠의 압제에 맞섰던 현장이 문경인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 있었다”며 “표지석 하나 없는 현실 속에서 이제라도 이런 역사를 발굴하고 기리는 일에 지역사회와 위정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해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문경매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