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옛 쌍용양회 공장, ‘우수건축자산’ 넘어 ‘공동체 유산’으로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시멘트를 구워내던 거대한 회전 킬른과 사일로가 그대로 남아 있는 문경 옛 쌍용양회 공장. 한때 기계음과 노동자들의 발걸음으로 쉴 틈 없던 공장에 지난 7일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이번에는 시멘트를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장에 남은 산업의 역사와 노동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고 미래 세대에 물려줄 것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2026 문경 옛 쌍용양회 공장의 유산화와 미래 활용을 위한 학술세미나’가 이날 오후 2시 옛 쌍용양회 문경공장에서 열렸다.
행사에는 김학홍 문경시장을 비롯해 문경시의회 서정식 의장과 의원, 학계와 건축·도시 분야 전문가, 은퇴 노동자, 지역 주민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특히 한 시절을 이 공장에서 보낸 은퇴 노동자들이 자리를 함께하면서 학술적인 논의를 넘어 살아 있는 산업현장의 기억을 되짚는 자리가 됐다.
문경시도시재생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건축역사도시유산연구실이 주관한 이번 세미나는 옛 쌍용양회 공장을 단순히 오래된 산업 시설로 바라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의 삶과 지역 주민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동체 유산’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공동체 유산은 건물이나 시설물 자체의 물리적 가치뿐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이야기를 함께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개념이다. 결국 공장을 보존한다는 것은 낡은 건물을 남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삶과 문경의 산업사를 함께 기록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문경 시멘트 공장은 1957년 가동을 시작해 한국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이곳에서 생산된 시멘트는 전후 도시와 도로,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다시 세우는 데 사용되며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국내 시멘트 공장 가운데 드물게 습식공정(Slurry Process) 설비를 비롯해 길이 130m에 달하는 거대한 회전 킬른(Kiln)과 사일로(Silo) 등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어 산업사와 건축·기술사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날 참석자들은 실제 공장 시설을 눈앞에 두고 산업 유산의 보존과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거대한 시설물 자체가 세미나의 배경이자 살아 있는 자료가 됐다.
1부 학술발표에서 이연경 연세대 교수는 전후 복구 산업 유산이 오늘날 갖는 의미를 짚고, 공장 시설을 보존하면서 단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생 로드맵을 제시했다.
이어 안근철 장소기억프로젝트 대표와 김환국·유성해·이병각 은퇴 노동자가 참여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는 구술사 채록과 주민 참여형 축제 등 지역 자산화 사례를 공유했다. 은퇴 노동자들의 기억은 문서나 시설물만으로는 복원하기 어려운 당시 작업환경과 공장의 일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중요한 산업 유산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김효영·이정은 소장과 김은희 경인콜렉티브 대표는 다른 지역에서 추진된 산업 유산 재생 사례를 소개하며 문경만의 역사와 장소성을 살린 활용 방안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2부 라운드테이블에서는 이연경 교수가 좌장을 맡아 문경시의원과 주민협의체, 건축·도시 분야 전문가 등이 머리를 맞댔다.
참석자들은 옛 쌍용양회 공장의 우수건축자산 등록을 비롯한 제도적 지원 방안부터 국가등록유산과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까지 폭넓게 의견을 나눴다. 특히 단순한 시설 보존에 머물지 않고 시민들이 찾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되살리는 방안과 은퇴 노동자·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아카이빙, 전시, 축제 등 다양한 활용 방안도 논의됐다.
윤효근 문경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은 “산업유산 재생은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를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가 자긍심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며 “은퇴 노동자와 주민이 주도하는 아카이빙과 문화축제의 성과를 지속가능한 미래 자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학홍 문경시장은 “문경 옛 쌍용양회 공장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일으켜 세운 땀과 헌신의 산실”이라며 “우수건축자산 및 국가등록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키고 시민과 호흡하는 복합문화 거점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는 ‘오래된 공장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지만 논의의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었다. 거대한 킬른과 사일로를 보존하는 것만큼 그곳에서 일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기억을 기록하고, 주민들이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70년 가까이 문경의 산업사를 지켜본 옛 쌍용양회 공장. 한 시대의 생산 시설로 역할을 다한 이곳이 이제 산업화의 기억과 노동자의 삶, 시민의 문화가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문경매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