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비우고 자연을 품다… 문경 동로면 '누리치유마을' 르포

경북 문경시 동로면 석항리. 자동차가 마을을 벗어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면 도시의 소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백두대간 능선에서 내려오는 바람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만이 귀를 채운다.
해발 500~600m. 사람 살기에 가장 적합한 높이라고 알려진 이곳 깊은 산중에는 세상과 조금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공간이 있다. '누리치유마을'. 화려한 건물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상업시설도 없다. 대신 숲과 바위, 노천법당, 자작나무 숲길, 그리고 사람을 쉬게 하는 자연만이 있다.
이 마을을 20여 년 동안 묵묵히 만들어 온 이는 1955년생 백재환 대표다. 대구에서 세무공무원으로 평생을 근무한 뒤 세무사로 활동하고 있는 백 대표는 2004년 문경 사람과의 인연으로 처음 석항리를 찾았다. 그때 들은 한마디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사람이 가장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곳은 해발 600m입니다."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는 조금씩 토지를 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매입한 땅은 산 4만 평, 밭 1만5천 평.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길을 내고, 숲을 가꾸고, 수행 길을 만들며 오늘의 누리치유마을을 완성했다.
백 대표는 "처음에는 나 하나 쉬려고 시작했지만, 좋은 곳은 많은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욕심을 내기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했다.
누리치유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하나는 자작나무 숲길이다. 하지만 이 숲도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낙엽송 숲이었다. 백 대표는 단조로운 낙엽송 숲을 하나씩 걷어내고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긴 세월을 견딘 나무들은 이제 숲을 이루었고, 흰 줄기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명상길이 됐다.

숲길을 걷다 보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산비탈 곳곳에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두릅과 땅두릅이다. 원래는 백 대표가 직접 심어 재배하던 밭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농사를 접었다.
사람들은 폐원이라고 말하지만, 자연은 달랐다. 땅속에 남은 뿌리들이 해마다 새순을 틔웠고, 두릅들은 숲과 어우러져 스스로 번식하며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마치 인간이 심어 놓은 생명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숲의 일부가 된 모습이다. 백 대표는 "사람이 애써 키우는 것보다 자연이 키우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며 웃었다.
백 대표의 철학은 땅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소유한 1만 5천 평의 밭 대부분은 마을 주민들이 무상으로 경작하고 있다. 임대료도 없다. 그는 "땅은 놀리면 안 된다.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것이 가장 좋은 활용"이라고 말한다.

방문객을 위한 18평 규모의 게스트하우스 역시 숙박비를 받지 않는다. 치유 체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머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편의시설은 많지 않지만 자연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몸보다 먼저 쉬는 것은 마음이다.
누리치유마을은 병을 치료하는 시설이 아니다.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치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마음공부는 스스로가" 이곳은 몸보다 마음을 먼저 쉬게 하는 공간이다. 치유 프로그램도 자연 그대로다.
6개의 걷기 명상 코스를 따라 백두대간의 정기를 느끼며 걷고, 자작나무 숲길에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노천 법당에서는 참선하고, 원시림 산책길에서는 숲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체력이 되는 사람은 좌선대로 향하는 등산길을 따라 오르며 자신과 마주한다.

마을 주민들도 백 대표의 20년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석항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고재식(68) 씨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왜 산에 저렇게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지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보니 숲이 살아나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밭을 주민들에게 그냥 쓰게 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덕분에 우리도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었죠."
또 다른 주민 박모(63) 씨는 백 대표의 삶을 "욕심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게스트하우스도 돈 벌려고 만든 게 아니고, 쉬어가라는 마음으로 지어놨어요. 도시에서 지친 사람들이 와서 하루만 있어도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런 걸 보면 이곳이 정말 사람을 치유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리치유마을에는 화려한 조형물도, 대형 건축물도 없다. 노천 법당 역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은 채 바위와 숲을 그대로 수행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백 대표는 말한다. "산은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자연을 조금만 도와주면 나머지는 자연이 스스로 해냅니다."
실제로 숲은 스스로 자라고, 두릅은 스스로 번지며, 사람들은 숲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빠른 속도가 경쟁력이 된 시대. 누리치유마을에는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숨 쉬고, 천천히 자신을 돌아본다. 20년 동안 한 사람의 땀과 철학이 만들어 낸 이 작은 산중 마을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쉼'이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품은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백재환 대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치유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자연을 만날 수 있도록 길만 만들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 말처럼 누리치유마을은 오늘도 백두대간의 바람을 맞으며, 지친 사람들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문경매일신문
